오늘날 물질이 원자라고 불리는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초등학교에서 배우고 상급학교를 통해 심화되었다. 기원전 450년에 이미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레우키포스가 원자의 개념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더 쪼갤 수 없을 정도의 가장 작은 조각은, '쪼갤 수 없는'이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 'atomos'를 따서 원자(atom)라고 명명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생명의 기본 개체가 원자로 구성되었다는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을 불신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자연 철학자'라고 했는데, 이 전통이 이어져 미국의 과학자들이 받는 대학에서 가장 높은 학위는 철학 박사의 약자인 Ph.D라고 불린다.
과학자들이 기체의 특성과 법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17세기까지 원자에 대해 제안된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많지 않다. 보일, 샤를, 그리고 게이뤼삭의 연구는 기체 내의 작은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전재했다. 화학자 및 물리 화학자들은 많은 중요한 진보를 이루었다. 1799년에 프랑스의 화학자인 프루스트(1754~1826)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원소들이 결합하여 화합물을 형성할 때, 원소들 간의 무기(또는 질량) 비율이 항상 동일하다는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제안하였다. 물(H2O)은 질량에 의하면 항상 1개의 수소와 8개의 산소에 의해 형성 된다.
원자이론의 아버지 돌턴
영국인 화학자 존 돌턴(1766~1844)은 물질에 대한 현대 원자 이론의 대부분을 구축하였다. 1803년에는 원소들이 원자들로 구성되는 경우 물질의 원자 이론으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각 원소들은 물리적 및 화학적 특성이 있는 원자들을 가지고 있다. 원자량(또는 질량) 의 개념은 원자 이론의 핵심 이었다.
아보가드로 수
1811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아보가드로는 개개의 또는 결합된 원자들로 구성된 분자의 존재를 제안했다. 아보가드로는 모든 기체가 같은 온도와 압력에서 같은 부피에는 같은 수의 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 없이 언급했다. 아보가드로의 아이디어는 같은 종류의 원자들끼리 결합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돌턴과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조롱당했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면, 그들은 기체의 모든 원자들은 결합하여 액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분자와 원자의 개념은 상상하기 매우 어려웠지만 결국 1858년 이탈리아의 화학자인 카니차로(1826~1910)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아보가드로의 아이디어가 원자 질랼을 구하는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였다. 오늘날에는 특정한 원소로 식별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원자라고 생각한다. 분자는 단일 원자 및 동종이나 이종의 두개 또는 그 이상의 원자의 조합이 될 수 있다. 분자들은 수천 개의 원자들로 구성될 수도 있다.
1그램-분자량을 갖는 특정 원소의 분자의 수(6.023x10^23 분자/몰)를 아보가드로수(NA)라고 한다. 예를 들어 1몰의 수소는 약 2g의 질량을 가지고 있고 1몰의 탄소는 약 12g의 질량을 가지고 있다. 각 물질 1몰은 6.023x10^23개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아보가드로의 수는 1865년까지 측정되지 못했다. 그 해에 페랭에 의해 정확한 측정이 이루어졌다.
1800년대 중반에는 기체의 운동 이론은 개발되고 있었고, 원자의 개념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 성공은 원자 이론에 유효성을 제공했다. ㅂ열, 맥스웰 속력분포, 및 수송현상의 보든 실험 결과들은 원자 이론의 개념을 지원했다.
1827년 영국 식물하자인 로버트 브라운은 현미경으로 물에 떠 있는 작은 꽃가루 입자의 운동을 관찰했다.물이 잔잔한 동안 꽃가루는 무작위로 움직이며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이 운동(브라운 운동)이 대류 또는 유기 물질 때문인 것으로 여겼지만 결국엔 액체에 부유한느 작은 입자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원자 이론에 따른 설명은 액체의 분자들이 지속적으로 작은 입자들에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설명은 20세기가 되서야 아인슈타인에 의해 주어졌다.
원장 이론의 반대
이 물질의 원자 이론은 전세계적으로 19세기 말까지 인정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믿었지만 반대도 여전히 있었다. 반원자 운동의 주요 지도자는 저명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였다. 마흐는 절대적인 실증주의자였고 그저 자신이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사실만 믿었다. 마흐의 추론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원자를 본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독일의 물리 화학자 빌헬름 오스트발트는 마흐를 철학적으로 지원할 뿐만 아니라 그의 편에서 현실적인 논쟁거리를 지원했다. 1900년대에는 방사능, x선, 이산 스펙트럼선, 및 원자로 분자와 고체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등등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오스트발트는 따라서 원자를 화학 반응의 기록에 유용한 가상적인 구조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원자 이론은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양자이론의 창시자인 막스 플랑크는 자신의 복사이론이 초미세 양자들의 존재를 지원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물질의 원자 이론을 받아들였다. 볼츠만은 그의 통계역학에 필요로 했기 때문에 원자가 존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볼츠만은 1905년에 자살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부분적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그의 이론을 거부해서 낙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여전히 원자 이론의 유효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1916년에 세상을 떠난 마흐조차도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원자의 사진이 있다.
원자이론의 압도적 증거
원자의 존재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는 마침내 20세기의 첫 10년에 등장하게 되었다. 첫째,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출판한 자신의 3대 논문 중 하나는 로버트 브라운에 의해 거의 80년 전에 관찰된 브라운 운동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아인슈타인은 분자 운동의 측면에서 움직임을 설명하고 무작위 걷기(random walk) 문제애 대한 이론적 계산을 제안했다. 무작위 걷기는 초기 위치에서 많은 무작위의 분자 충돌이 있은 후 작은 입자가 초기 위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게 되는 통계적인 과정이다. 아인슈타인은 실험 데이터로부터 원자와 분자의 대략적인 질량과 크기를 결정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08년에 프랑스 물리학자인 장 페랭은 운동이론을 사용하여 고안한 실험을 통하여 아인슈타인의 예측과 부합하는 데이터를 발표했다. 페랭은 이 실험을 통하여 다양한 크기의 많은 입자들을 관찰하였고, 그 결과 192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실험은 네 가지 유형의 측정을 활용하였다. 각각은 원자 이론과 일치했고 아보가드로수의 정량적인 결정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그때까지 해 온 것 중, 최초의 정확한 측정이었다. 1908년부터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물질의 원자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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